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치허 전투 (문단 편집) == 이후 == 1940년 3월 일본군 마에다 부대와 싸워 이긴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계속 도주해야 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은 [[독소전쟁]]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941년 3월 말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훙치허 전투 이후인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게릴라 부대에 대처하기 위해 훨씬 큰 규모의 게릴라 진압부대를 조직했다. 이 시기에 이후 [[북한]] 정권의 지도부가 될 [[최용건]], [[김책]] 등이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다.[* 즉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을 비롯한 약 200명의 주요 게릴라 지휘자들은 만주벌판을 셀 수도 없는 한국인의 피로 물들인 무자비한 진압작전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다.] 1940년 10월 김일성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고 김일성은 훈춘을 떠나 10월 23일 [[소련]]으로 갔다. 1941년 2월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 하루끼에 따르면 하바롭스크 야영은 A야영과 B야영으로 나뉜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인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인 제88특별여단으로 편성됐고 1945년 8월 소련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북한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북한으로 진입한 군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다만 소련의 붉은 군대 소속으로 대일전에 참가하여 공로를 세운 조선인들은 적잖게 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몇몇 한인 집단이 [[소련군]]의 진주를 도와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소련군 제25군에 한인부대가 있었다고 한다.(한국전쟁의 기원 p.477)] 북한에서는 교육은 하지만 [[보천보 전투]]만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보천보 전투와는 달리 실질적인 군사적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한반도에 처음으로 진입했다는 상징성이 없고 상대도 일본군이 아닌 경찰이었던 데다 중국 땅에서 벌어졌던 전투였기 때문인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